죽음을 감지하는 감각

아파트 같은 층에서 계속 이상한 냄새가 났었다. 의심하지 않았던 건 매일 카레를 끓이는 이웃과 살았던 적이 있어서였다. 카레는 그들의 주된 음식이고 한국인이 김치를 먹듯 카레를 먹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라며 ‘카레 맛있겠다’ 같은 생각이나 하고 지나갔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조금 시큼하긴 했지만서도 냄새나는 음식을 매일 끓일 수도 있지 라며 수상한 냄새에 그냥 넘어가곤 했다. 어느날은 난데없이 화재경보기가 아파트를 쩌렁쩌렁 울려댔었다. 급기야 어느날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했다. 참다 못한 다른 이웃이 신고를 했던 모양이고, 경찰이 여럿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소방서 사람들이 나타났고, 들것이 올라왔으며, 그들은 빠루로 문을 부순 뒤 시신을 꺼내어갔다. 집 앞에서 전화로 보고를 하는 바람에 인적사항을 다 듣고 말았다. 내 연배의 분이었다. 다음날 그 집 문앞에는 경찰통제선 테이프가 나붙었다.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최근에 종종 떠올리곤 했다. 젊은 시기 반짝거리는 업적 두어개만 해낸 뒤 요절하는게 최고라고 늘 생각하다가 업적은 커녕 나도 모르게 나이 앞자리만 수어번 바뀌고 말았다. 무병장수는 옛날 이야기고 유병장수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무병단수라도 하면 다행이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여러 죽음을 만났고, 여러 장례식을 다녀갔지만, 감각으로 죽음을 맞이한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 냄새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당분간은 몇가지 음식을 먹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주말 사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할지에 대해 주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녀를 가질 생각이 없고, 한국은 사회적 돌봄이 없는 사회인데다, 출생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영화 ‘플랜 75’마냥 자살이나 안락사가 권장되는 사회가 늦지 않게 들이닥치지 않을까 상상했다. 실버타운이나 요양병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다행이고, 그게 아니라면 역시 스스로의 마무리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스위스가 답이 아닐까-라며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그 방법 말고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존엄한 마무리라는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더 해낼 수 있을지 궁리해야할 와중에, 어떻게 마무리할지까지 궁리해야한다니 인간의 삶이란 이토록 까다롭구나 싶은 것이다. 슬프지 않게 마무리하고 싶다. 내 장례식에는 좋은 음악이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좋은 일을 한 사람으로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남아있는 시간동안 그런 일을 할 기회들이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남 좋은 일만 해달라고들 하니까. 아니다. 좋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만 해도 좋겠다. 어디 그마저도 쉽겠냐만은. 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만나는 공간에선 좋은 향이 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디퓨저를 많이 가져다놓아달라고, 룸 스프레이를 규칙적으로 뿌려달라고 부탁할까 한다.

글을 쓰고 나니 슬픔이 조금은 덜 해졌다.

이제 남은 시간동안 무얼 할지만 궁리하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