땐스광 처벌과 여성혐오

고귀한 혁명정신을 망각하고, 대낮에 땐스에 미쳐 놀아난 48명의 남녀가 검거되어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5월 24일 경기도청 회의실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는 우리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혁명정신을 모독한 땐스광들에게 일벌백계의 본보기로서 각각 3개월 내지 1년의 징역을 언도했습니다. – 대한뉴스 315호

1960년 5월 16일에 한국에서 있었던 군사쿠데타 직후 군부는 소위 ‘혁명공약’ 이행과 함께 댄스광 처벌을 성과로 내세웠다. 계엄 선포 이후 대낮에 춤 좀 췄다고 징역 1년씩이나 때리던 시기를 21세기 시민들은 ‘미개하다’고 이야기하지만, 1960년대 당시의 여론은 사뭇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 「댄스」광 처벌 ◀ 썩 잘했다 73.5% ◀ 대체로 잘했다 17.1% ◀ 지나쳤다 6.4%

부산일보 1961년 6월 14일자, <革命政府 施策을 全幅支持>

잘했다는 여론이 90%이다. 심지어 위 영상에도 구경나온 시민들(남성들)의 표정이 매우 밝아보인다. 춤 좀 췄다고 처벌하나 인권침해 아닌가? 라고 두려워하기보다 “쌤통이다”라는 표정들임을 알 수 있다.

댄스 처벌은 군사쿠데타 직후 여론전환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다. 댄스장 단속이나 댄스 처벌은 군사쿠데타 이후 군부정권 내내 계속된다. 집에서 춤을 추어도 “비밀 댄스홀”로 간주되어 처벌되었다.

[부산] 19일 동부경찰서는 김원숙(30, 초량동 45) 외 5명을 백주에 비밀 댄스홀에서 춤춘 혐의로 즉결에 회부했다. 이들은 지난 18일하오3시30분경 김씨의 방에서 왜음곡을 틀어놓고 댄스를 하다 경찰에 연행된것이다.   – 경향신문, 1963년 3월 20일자, <댄스광6명즉재>

자기 집 방에서 음악 틀어놓고 춤을 추다 경찰이 들이닥쳐 즉결에 회부된 김원숙씨는 체포 당시 30세였다. 매일 인스타와 틱톡에 춤사위 비디오가 올라오는 21세기 광경을 1963년의 경찰들이 보면 까무라칠 것이다.

군사정부가 실업구제, 깡패단속뿐만 아니라 ‘댄스광 처벌’을 ‘본보기’ 삼아 추진했던 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에 대해선 한국언론학보 2009년 4월호에 실린 <1950년대 중반 댄스 열풍 : 젠더와 전통의 재구성> (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논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여성의 정조 문제, 그러니까 소위 처녀의 순결성 문제였다. 한국전쟁 직후 터진 사건이 발단이다. 1954년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100여명의 여성을 간음한 혐의로, 박인수 라는 이가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관계된 상당수 여성들이 ‘여대생’이었고, 법정 진술에서 ‘댄스홀에서 함께 춤을 춘 후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 이라고 진술하면서 댄스홀이 사회 타락의 원흉이자 선봉장인 것마냥 부각되었다. 당시 박인수가 ‘순결 확률은 70분의 1’ 등을 외친 것이 사회의 유행어가 되며 ‘여대생의 정조(순결) 문제’가 주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고, 춤을 추기 위해 댄스홀을 다니던 여성들은 세간의 거센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소위 “댄스홀 다니는 여자는 순결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자가 누구였든 간에, 시대가 언제였든 간에, 늘 똑같다. 1950년대 박인수 사건 당시에도 남성을 비난하기보다 ‘댄스홀에 출입하는’ 여성부터 패겠다는 기조는 굳건했다.

모윤숙 : 박인수 사건 같은 것도 그것은 남자가 나뻐요. 여자들은 성 문제에 대해서 억압을 주어서 순진한 까닭에 거기에 넘어갔다는 죄는 있을지언정 나뻐서 넘어간것은 아니에요

박순천 : 그것은 그렇지 않아요. 처녀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일조일석에 꺾지 못하는 굳은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해방후의 고약한 사조가 모든 아이들에게 바람을 피우도록 만들었어요. 좌우간 우리가 생각할 때에 박인수란 녀석이 색마이든 무엇이든 한 사내에게 많은 여자가 걸렸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통분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리고 모든 여자들을 내 딸로 볼 때에 채찍을 든다고 할 것 같으면 박인수를 때리기보다도 내 딸을 먼저 때리겠어요.

– 동아일보, 1956년 1월 19일자, <1956년과 여성, 박순천 모윤숙 양여사대담(4)>

또 하나는 가정을 지켜야할 여성의 책임 문제, 그러니까 어머니 정체성이었다. 전쟁 직후 식구를 먹여살리느라 사회로 나가는 기혼 여성과 전쟁미망인들이 남편과 가정을 돌보지는 않고, 정조가 위태로워질 댄스홀에서 외간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댄스에 미쳐 놀아났다는 식이다.

아들 딸 6남매의 어머니인 중년부인이 실직 중의 남편을 위로하기는커녕 “지금 생활은 내 이상에 맞지 않는다” 고 입버릇처럼 내뿜으며 어려운 살림도 돌보지 않고 여름이면 “하이-힐”에 “파라솔”, 겨울이면 “비로드” 치마저고리에 양단 두루마기를 몸에 휘감고 들떠돌아다니는 바람에 이를 비관한 남편은 마침내 자식 6남매를 남기고 음독자살을 하고 만 가정비극이 있다.

부인 임씨는 “내가 생활을 돌본다”고 시내 창신동에 “광명미용원” 미용사로 취직, 취직 후는 아침 9시부터 밤늦게까지 미용원을 중심으로 한 유한”매담”들과 거리를 싸다니며 수입금으로 몸치장하기에 바쁜 “허영의 생활을 시작하여”…마침내 “이혼합시다”로 변해…이를 비관한 남편 김씨는 세상을 비관코 끝내 자살하고야 만 것이라고 한다.

동내사람들 말에 의하면 … 임씨는 항시 화려한 몸차림에 짙은 화장을 하고 “딴쓰“니 “드라이브”등 외마디 영어를 자랑하기를 좋아했었다고 하는데 김씨의 자살을 보고 동내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부인 임씨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있다.

– 동아일보, 1956년 1월 19일자, <아내는 사치에 눈어둡고>

가장노릇을 하지 못한 남편의 음독자살 기사에 “동내사람들” 말까지 끌어다 부인을 비난하고 있다. 당시 요구되어온 “어머니 정체성”에 대해선, 여성 독자를 향했으나 여성 꾸짖기에 앞장섰던 당시 여성잡지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겸후하게 지켜오던 부덕이 무너지고 집안 살림살이를 천직으로 알던 여성들이 집을 비우고 야비한 취미와 일시적 향락에 정기를 잃고 땐스홀이나 다방 출입을 일과로 삼으며…    – 최이순, 녹원綠苑 창간호, 1956년, <女性과 家庭> p26

한국전쟁 이후 가정으로 돌아온 남성의 위신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성들 대신 가정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여성들에게 댄스홀은 사교장, 요즘으로 치면 네트워킹 파티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보는 당시 사회, 특히 남성들의 시선은 요즘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전쟁 직후 ‘아프레 걸’이니 ‘양공주’니 하며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다방 출입을 일과로 삼으며” 라는 문장은 스타벅스에 머무르는 여성을 향한 21세기 한국 남성의 증오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에 대등한 증오 대상에 “땐스홀”이 있었다.

댄스를 증오하여 “댄스광” 호명을 반복하며 국가가 나서 처벌할 것을 청하는 일은 1950-60년대로 그치지 않고 10월 유신이 있었던 1970년대에까지 이어진다.

이번의 10월유신을 통해 그동안 우리 주변에 깊숙이 뿌리박혀있는 만성적인 사회부조리를 뿌리째뽑아 명랑한 국가건설을 해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과거 5.16때 깡패 댄스광 등 사회의 암적 존재를 소탕한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후 다시 그들이 활개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다시 그런자들이 발붙일곳이 없도록 해야한다.    – 경향신문, 1972년 11월 4일자, <사회악 다시발붙일곳 없도록>

이 시기는 이화여대 정문에서 고대생들이 ‘사치배격대회’를 열어 ‘귀부인과 같은 손가락으로 쌀을 씻어라’, ‘하이힐을 벗고 단화를 신어라’ 같은 구호를 외치던 시기와 불과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댄스광을 깡패와 동일시하여 호명하고, 사회의 암적 존재로 여기는 모습에서 21세기 한국 인터넷의 어떤 여성혐오 담론이 떠오르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땐스광 처벌에 드리운 여성혐오

댄스에 대한 증오는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던’ 시기, 그 원인으로 지목된 여성의 정조(순결) 문제와 행실(춤바람과 허영에 빠진..)문제과 결부되어있음을 앞서 본 옛날 기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국가와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춤바람 난 여성들과 특권층(?)을 단속하여 “한국전쟁을 겪은 상이군인을 비롯한 남성들”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요구에 군사정부가 적극 호응한 결과가 “땐스광 처벌”이다. 그 기세는 군사정부 막바지인 1990년대에까지 이어진다. 비난이 ‘부녀자’를 향하는 것도 40년 전이나 그때나 크게 다르지 않다.

치안본부는 12일 카바레댄스교습소 나이트클럽등에대한 기습단속을 벌여 불법영업을 한 업주와 대낮에 이들 업소에 출입한 부녀자등 8천9백6명을 적발했다. 경찰은 이들중 조직폭력배10개파 1백27명을 포함, 2백28명을 구속하고 1천4백93명을 불구속입건했으며 가정주부등 7천1백85명에 대해서는 조사후 훈방했다.   – 동아일보, 1990년 10월 13일자, <카바레 춤교습소 나이트클럽 기습단속 주부등 8천여명 적발>

댄스홀, 댄스학원 등이 합법화된 것은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댄스뮤직이 K-POP의 주 장르로 등장한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더는 댄스학원에 다닌다고 퇴폐니 변태니 불륜이니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2020년대에까지 명맥이 내려오는게 있다면,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에 대한 과잉된 분노와, 공권력과 산업을 동원해서라도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을 처벌코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일 것이다. ‘미개-‘ 하다고 덧글이 달리는 1960년대의 장면이 60년이 지난 2020년대라고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