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020 회고
간단한 한 해 회고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걸 쓰려면 밀린 회고부터 다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리랜서 개발자
일하던 직장을 나와 2014년부터 프리랜서 개발자로 일을 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왜 나왔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는데, 프리랜서 일도 젊을 때 해봐야지 나이들어서 언제 해보겠나 라는 생각이 컸다. 재직 중 퇴근하고서 ‘충격 고로케’ 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가 화제가 되었던 것에서 착안하여 개인사업체 이름은 고로케컴퍼니로 지었다. 간단하며 비싼 외주 일감을 받아 3개월 가량 일을 하고 그걸로 1년을 먹고 살자는게 목표였다. 부수적으로는 강연이나 기고로 소득을 채울 생각이었다. 그때는 대중강연이 꽤나 수입이 좋다는 이야기가 나돌 때였다. 기회가 된다면 취미로 만들었던 몇 가지 토이프로젝트들을 사업화시켜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토이프로젝트
회사를 다닐 적과 프리랜서로 일할 적에 여러 토이프로젝트를 운영했다. 스스로 새로운 언어나 프레임워크를 익히기 위해 도전한 면도 있지만, ‘이런 사이트가 있으면 주변 친구들이 좋아하겠지’하고 기대했던 경우가 더 많았다. 토이프로젝트를 종류별로 분류하면 도구 사이트, 언론 분야, 출판 분야, 그리고 공연 분야의 웹서비스가 있었다. 도구 사이트로는 웹에서 비밀 일기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이트가 있었다. 언론 분야에선 언론사 기사를 크롤링해 몇가지 프레임으로 취합해 집계하는 사이트도 만들고, 내가 마음에 들어했던 매체 기사만 따로 큐레이팅하는 사이트도 만들었다. 출판 분야에선 독서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공연 분야에선 밴드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던 지라 홍대 일대의 작은 공연일정들을 모아 안내하는 가이드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웹서비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의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비스들이 단독으로 운영해서는 수익을 낼 수 있는 종류의 서비스는 아니었다. 다른 비즈니스와 결합되어야 수익을 낼 수 있는 경우였다. 출판분야, 공연분야, 언론분야 모두 돈이 안되는 분야라 나의 풀타임을 털어 기여하기엔 쉽지 않았다. 사업화를 하는데에 도움이 될 파트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래저래 수소문해보기도 했다. 산업계 분들은 대부분 파트너로 함께하기보다는 ‘시키는대로 만들어주고서 코드는 넘기고 떠나줄’ 개발자, 또는 취미 이상의 헌신을 해줄 개발자를 원했다.
급기야 독서기록 서비스는 대형온라인서점들이 비슷하게 카피캣을 만들어버렸고, 공연일정을 모아 제공하던 서비스는 정부기관 사람이 사이트를 넘기라며 찾아오기도 했다. 자기들이 그 사업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사이트 개발 운영자인 이준행 씨는 지난 6월 문화관광체육부 산하기관으로부터 황당한 요청을 받았습니다. 정부의 통합 문화포털에도 인디음악 소개코너를 만들 건데, 관련 데이터를 공짜로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인가 “ㅇㅇ 사이트를 운영하는 분이라 ㅇㅇ 해주실거라 기대했는데요” 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취미로 굴리려던 토이 프로젝트가 비용청구서나 유지보수 부담으로 돌아오고, 타인이 원하는 어떤 행동을 기대받는데에까지 이르고 있구나 싶었다. 어느 스님이 ‘말빚’을 지적했듯, 많은 토이프로젝트들은 훗날 돌아오는 빚이기도 하다. 각 토이프로젝트들은 만든이의 속성을 꾸준히 규정지었고, 관련 업계에서는 나에게 댓가 없이 더 많은 기여를 요구하였다.
이 메시지를 받은 날부터 토이프로젝트들을 하나씩 닫았다. 혹자는 사이트 운영을 종료한 것을 두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했지만, 온전히 개발자의 자발적 기여에 의존하는 서비스를 두고 개발자의 헌신을 더 요구하는건 합리적이지 않다. 이 과정을 거친 뒤, 지금은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하든, 끝을 먼저 상상하게 된다.
정치인들
선거철 정치인 캠프에 끼어 이런저런 자문을 해주며 사이트를 만들어주는 일의 수입이 꽤나 쏠쏠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몇 방법중 하나였다. 한편으론 대중들에겐 청렴하고 순수해보이기만 한 정치인이 실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알게된 시간이기도 했다. 아랫 사람들에게 폭압적이거나,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일머리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부패하는 쓰레기 주위로 파리가 꼬이듯, 몹쓸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드는 모습도 다들 비슷했다. 저런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면 안될텐데..싶었다. 유명한 사람이니까 한번 구경해볼까 하는 마음에 종종 그들의 호출에 응하곤 했는데, 다행히 몇 장면에서 기겁하고 더는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 장면들은 대략 이러했다.
- 초면에 격식을 갖추고 만나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덥다고 웃통을 훌러덩 벗어 ‘메리야쓰’ 차림으로 식사하는 이
- 매운탕을 시켜서는 국자로 각자 떠먹지 않고 자기 숟가락을 넣어 퍼먹는 이
- 나라와 민족, 민주진보세력, 또는 애국세력을 위한 일인데 왜 예산부터 묻느냐며 재능기부를 해주면 안되냐고 묻는 이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나쁜 일 안할거라 생각하는건 오산이다. 지급해야 할 돈은 반드시 밀리기 마련이었고, 약속된 금액은 후려쳐지기 마련이었다. 정치인 캠프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흔한 경우는 당선 뒤 나오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비용 보전비가 나왔을때 정산해주겠다고 나오는 경우이다. 스타트업이 BEP 넘긴 뒤 그 수익으로 나중에 보상을 해주겠다 둘러대듯, 선거캠프는 당선 후 선거비용 보전비로 보상을 주겠다고 둘러대는 셈이었다. 지급되어야 할 돈을 다른 기회로 돌려서 보전해주겠다는 제안도 흔했다. 예컨대 못받은 돈을 어느 정도의 수익을 챙길 수 있는 산하 기관장이나 별정직공무원 자리를 약속하며 되갚겠다는 식이다. ‘진보단일후보’ ‘보수단일후보’ 식으로 단일화되어 당선된 경우 각 캠프별로 나눠먹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기회를 못받을 가능성이 많았고, 기간을 쪼개거나 남의 기회를 가로채어 받아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때문에 돈을 다르게 돌려 주겠다면서 볼성사나운 대화들이 오가곤 했다. 당의 내부 경선을 거친 후보는 당의 몫을 제외하면 자기 캠프 몫이 있어 이 기회를 받아내기 쉬웠다. 하지만 그쪽도 그쪽 나름의 정산해야할 몫이 또 있어서 남의 돈을 내가 챙겨주어야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스타트업이 상장 후 잭팟을 터트리듯, 선거캠프는 당선 후 산하기관장 자리 나눠먹기로 잭팟을 터트릴 수 있다고 권하는 셈이다.
출마제안도 몇 번 받았다. 그걸 왜 거절했냐고 타박한 분도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종류의 거래에 따른 스트레스를 감수하고서라도 한국 사회의 어떤 부분을 고쳐보아야겠다는 절박함은 솔직히 없었다. 나름의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사회에 주장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돈 많이 벌어 빨리 이민이나 가야겠다는 생각만 더 커졌다.
커뮤니티 사이트
프리랜서 개발자로 일을 할 즈음 친구의 농담을 받아 무료 호스팅 서버에다가 PHP 제로보드 하나 설치했다가 터졌던 커뮤니티 사이트 ‘일간워스트’ 는 나에게 꽤나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도메인 주소로 트래픽은 거대하게 몰려오는데 고작 5분만에 무료 호스팅에 설치한 PHP 제로보드가 이를 감당할리 만무했다. 하루남짓 Django/Python으로 날림 코드를 짰다. 공격하려는건지 트레이닝시키는건지 알 수 없을 다양한 공격 트래픽이 쏟아졌다. 실시간으로 몰입해 대응했다. 속성 교육과정도 이런 속성 과정은 없을 것이다.
이 과정은 따로 글을 쓰기도 했다.
커뮤니티 서비스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20대 초반부터 가지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진짜로 커뮤니티 서비스를 떠안았다. 개발 분야에서든, 다른 분야에서든, 이 서비스를 꾸려온 시간들은 여러 방면에서 나를 성장시켰다.
- XSS 등의 각종 웹 공격 대응, 네트워크 공격 대응, 대규모 트래픽을 감당하는 인프라, 비용을 고려한 시스템 설계, 트래픽 기반 디스플레이 광고, 각종 선정적 이미지나 문구를 필터링하는 기술, 텍스트를 분석하는 소위 인공지능,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자원을 동원한 DDoS 공격 생태계 등등.. DevOps나 SRE, 네트워크 보안, 백엔드, 프론트엔드, 개발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계기가 되었다.
- 지금도 Django/Python은 MVP 개발에서든 일반 상용 서비스에서든 가장 좋은 프레임워크라고 생각한다. 이 언어와 이 프레임워크를 본격적으로 써볼 수 있는 기회였다. 원하는 바를 모두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신뢰를 가지고 있다.
- 사이버 세계의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한 계기이기도 했다. 서울 노원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20대 남성 계정의 실제 인물을 광주광역시 고등학교의 강연장에서 만났다. 그러니까 그는, 저녁의 온라인 세계에선 서울 노원구의 번듯한 직장인이지만 오프라인의 낮에는 광주광역시 한 고교에서 교복을 입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온라인 페르소나란게 원래 그렇다.
- 온라인 페르소나들은 저마다 독립된 자기 주관을 갖고 있는 시민을 자처했다. 실체를 알 길이 없었다. 어떤 정치인을 비난하는 글을 끌어올려달라는 연락이 모 당에서 온 뒤 각 커뮤니티마다 ‘ㅇㅇ에서 퍼왔어요’ 라며 관련글이 올라왔고, 일간워스트에도 같은 글이 올라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ㅇㅇ가 화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가 연달아 올라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선거 때마다 이 글의 노출을 크게 올려달라, 내려달라는 부탁이 이어졌다. 집단지성, 온라인 민주주의는 허상이었고, 온라인 여론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 여론 조성을 둘러싼 정치권력의 욕심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계기였다. 일간워스트라는 새로운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가 생겨났고,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의 트래픽이 조금씩 토막나면서, 각 정당, 어느 정당의 각 정파부터 청와대 관계자까지 정말 별별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와 협조를 구했다. 돈부터 내민 곳은 당시의 청와대였는데, 보수 대학생 단체 육성이나 개발자 생태계의 보수화, 일베 청년들의 활동 지원 등 정말 다양한 일을 진행하고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프로파간다에 대해서는 나도 익히 전공이었던 사람이지만 이 정도의 자원을 총 동원할 정도면 상대측은 도무지 이길 수 없겠구나 싶었다. 당시 정권에서 그 작업을 이끌던 이는 처벌받지 않은 채 계속 자기 언론사를 굴리고 있고, 자금 출처도 훗날 밝혀지긴 했지만 관계된 이들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가는건 이런 종류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전장중 내가 만든 커뮤니티 사이트도 있었다. 앞서 소개한 수상한 계정들이 계속 목격되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니, 온라인에서 보여지는 어느 누구의 주장도 상대방을 직접 알지 않는 한 진솔하게 읽혀지지 않았다.
사이트 운영자의 신원이 노출된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관심을 받고 이름이 알려지는게 처음에야 재밌었지만 당연히 대가가 따랐다. 해외에 있는 친구에게 사이트를 넘긴다고 공지를 내걸었고, 그 이후에도 수상한 작전 글들이 계속 올라오면서 사이트를 폐쇄하기로 하였다. 안정적이었던 수익원 하나가 사라지긴 했지만,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나 갈망했던 커뮤니티 서비스였는데, 운영해보고 나니 운영 경험만 나에게 남았고, 더는 커뮤니티 서비스를 만드는 일을 동경하지 않게 되었다.
온라인 여론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선 훗날 ‘드루킹 매크로’가 회자되었을때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다시 언급한 바 있다. 이 인터뷰는 안하고 싶었는데 기자의 집요한 설득 끝에 주루룩 불고 말았다. 그래도, 내가 목격했던 광경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긴건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늘 즐겁게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썼던 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수습이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고 사이트 화면을 회색으로 바꾸었다. 어떤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는 함께 애도해야하며, 드러나지 않은 진상을 밝혀내는데에 함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메갈리아와 페미니즘
일간워스트를 운영하던 시절 메갈리아 라는 사이트가 탄생하였다.
메르스 갤러리, 이후 메갈리아 라는 이름 하에 진행되었던 다양한 미러링은 사실 일간워스트에서 시도되었던 일베의 미러링과도 같은 맥락이라 여겨졌다. 일간워스트가 생겨났던 초기, 나에게 ‘진보판 일베’를 만들자고 요구했던 무리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소재로 한 합성이미지가 일베에서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을 소재로 한 합성 이미지를 만들자는 식이었다. 어떤 이들은 일베의 직관적 메시지와 영향력을 욕망하고 동경했다. 어느 협잡꾼의 제안이 아니라 유력 대선주자를 돕는 관계자들의 제안이었다. 일베 커뮤니티를 규탄하는 지점이 콘텐츠의 형식에 있는게 아니라, 공격의 상대가 자기 진영이어서였구나 싶었다. 프랑스의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테러 사건 이후 무엇이 좋은 풍자인지에 대해 종종 고민하곤 했는데, ‘진보판 일베’를 유익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역지사지로 ‘여성판 일베’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간워스트 커뮤니티 유저들이 시도했던 일베 미러링이 의미있는 시도라 주장한다면, 메갈리아가 시도하는 남초 커뮤니티의 미러링 또한 의미있는 시도로 여겨야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남성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성별간 임금격차가 분명히 존재하는 한국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면 미러링은 나름의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남성성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에 당황할 수야 있겠지만 수년간 여성비하를 즐겨왔던 남초 커뮤니티의 업보가 아닐까 했다. 시간이 지나 메갈리아 커뮤니티가 ‘아버지도 모욕한다’ ‘독립운동가도 모욕한다’며 패륜이라는 혐의를 덧씌운 이들도 있었고, 그에 대한 입장을 나에게 묻는 이들도 종종 있었지만, 그 즈음 부터는 ‘분탕꿀잼’ 이라는 글이 여러 남초 커뮤니티 사이트에 동시에 올라왔기 때문에 걸러 판단할 일이라 생각했다.
위와 같은 입장을 밝힌 이유로 나는 소위 ‘남성 페미니스트’ 또는 ‘메갈 성향 개발자’로 분류되어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퇴출 대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종종 출연하던 팟캐스트에는 나를 퇴출시키라는 댓글이 여럿 달렸다. 그 즈음 출연 거의 안하던 사람을 퇴출시키라 요구하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당시 여러 팟캐스트들이 곤혹스러워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이슈에 대해 아닌건 아니라고 말을 해야하는데 인셀 사용자들의 청취 점유율이 광고수익에 직결되고 있는 난처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시사 팟캐스트라는 이들은 실은 꽤나 영세했기 때문에 제 목소리를 내는 곳들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침묵을 유지했으며, 인셀 청취자들은 진행자들이 고분고분해졌다며 만족했던 것을 기억한다.
메갈리아 사이트를 직접 만들려던 운영진들이 나에게 사이트 제작을 도와달라고 메일을 보내왔고, 사이트 개발비를 들일 바에야 그냥 게시판 하나 만들어줄테니 개발비는 라이따이한이나 코피노 관련 취재활동 예산으로 쓰는게 어떻겠냐고 답장을 써서 보낸 일이 있었다. 이 이메일이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겔러리에 올라왔다. 나에게 씌워진 혐의는 더욱 분명해졌다. 메갈리아 사이트를 만들려는 이들의 움직임을 제지하기는 커녕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었고, 심지어 라이따이한이나 코피노 이슈를 다루자고 제안했으니 더욱 괘씸하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부터 어느 위키에는 나의 밥줄을 끊어야 한다며 내가 어떤 글을 썼는지, 어떤 이슈에 지지의사를 밝혔는지 실시간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넥슨이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성우를 교체한 사건이 있었고 항의하는 대열에 나도 연대하는 글을 쓴 일이 있었다. 덕분에 나도 ‘확인된 메갈 명단’에 올랐다. 화제가 된 티셔츠에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 라고 적혀있었고, 단지 그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어떤 게임에서 목소리가 지워지는 폭력적 조치가 이루어진 것인데, 인셀 무리들은 ‘왕자는 필요없다’는 목소리가 폭력적이고 무례하여 용납할 수 없다고들 주장하였다. 같은 문구가 쓰여진 티셔츠를 입었다고 구구단 세정이 ‘메갈’로 지목되었고, <82년생 김지영> 책을 읽었다고 아이린과 소녀시대 수영이 ‘메갈’ 로 지목되었다. 그쯤 되니 이 인셀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모조리 ‘자이니치’로 지목하는 옆나라 우익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어떤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늘 현실세계에서 목격되는 불합리를 이해하는 창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사이버세계에서 누군가를 ‘진압’하고 ‘때리며’ 세를 과시하려는 놀이의 소재에 불과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알면서 모른척 하는, 염치를 모르는 이들이라 생각한다.
Fake News
내가 메갈리아 워마드 사이트를 만들었다고 인터넷에 글을 써내려갔던 이를 붙잡고 보니 14살 중학생이었다. 반성문만 받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 사건은 공교육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요즘 정규 교육과정에 꾸준히 반영되고 있는 편이다. 거짓 선전에 인센티브를 주는 온라인 생태계가 문제이다. 사회도 일정 부분 아이들에게 교과서로 기능하고 있고, 인터넷은 특히 그렇다. 이 사건은 플랫폼과 생태계의 책임이 클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거나 악성 정보의 확산을 묵인 방조하는, 웹서비스를 만드는 이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칼럼과 팟캐스트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고, 몇 온라인 매체에도 내 글이 발행되었으며, 이후 한겨례에 고정 칼럼 지면을 받아 연재를 했다.
종종 시사 팟캐스트에도 출연하였다. 보통 블로그에 글을 쓰면 그 주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출연하곤 했다. 팟캐스트는 위에서 언급한 페미니즘 이슈에 온갖 팟캐스트들이 다 휩싸이면서, 내가 출연했다간 청취자가 떨어져나갈 것이 분명해져 더는 출연은 안하고 개인적으로만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한겨레 지면에는 총 3년간 글을 썼다. 기술과 사회를 둘러싼 이슈를 다루는건 신문사에서도 좋아했고 나도 좋았다. 온라인 매체가 아니라 지면에 쓰는 글이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만나는 독자층과는 다르게 정치권이나 50대 이상을 대상으로 쓰는 글이 많았다. 페미니즘 이슈가 부상한 이후에는 종종 그 지면이 가지는 무게를 빌려 20~30대를 대상으로 하는 글을 쓰기도 했고 당연히 몇 남초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항의가 쏟아졌다. 스타트업에 합류하면서부터는 이 지면을 통해 회사가 이득을 얻어야 한다는 여러 요구들까지 마주하였다. 그쯤부터는 쓰고싶은 글을 자유로이 쓸 수 없었고, 비판하고자 하는 이슈를 더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돌리고 돌려서 자조하는 글을 주로 보내곤 했다. 마지막 해에는 더는 글을 쓸 수 없다며 연재를 종료하겠다는 뜻을 여러번 전하였다. 세상을 바라보고 깊이있게 성찰하기엔 나조차도 더는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기업에 종사하는 이가 지면 글을 쓴다고 하면 이런 배경이 있겠구나 하고 짐작게 된다. 특히 정치권 컨설팅을 수행하는 빅데이터 업체 관계자 또는 그쪽과 어울려 다니는 이가 지면 칼럼을 쓰면 100% 주문형 칼럼일 수 밖에 없다. 오피니언 커뮤니티가 더욱 풍성해져야 민주주의와 공론장이 잘 기능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문형 오피니언이 더 선호되는 시대에는 쉽지 않은 과제라 생각한다.
5163부대, 국가정보원 해킹팀 스캔들
이 사건은 아래 글에서 자세히 소개했다.
이 사건은 21세기 커뮤니케이션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의 투명성과 민주성과 결부되는 문제였다. 기간통신망을 차지할 수 있는 국가기관이 백도어를 설치하고, 누군가를 특정해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려던 시도였기 때문이다. 덩달아 이러한 활동을 합법화시킬 수 있는 입법 시도가 있었던 와중에 발각된 자료였다. 이 사안의 심각성을 다루어야할 한국 언론사 어디에서도 제대로된 보도가 나오지 않았다. 한국 언론사 어느 누구도 데이터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고, 확보하고서도 기사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내가 문서를 캡쳐해다가 글을 써서 공개했다. 번역을 도와주었던 친구가 운영하던 매체에 먼저 글을 보내었는데 이걸 두고 지상파 방송사 간부급 기자와 그 매체의 멘토를 자처하는 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너네가 뭔데 이 사안을 다루냐며 다그치기도 했다. 함부로 권력기관을 건드리지 마라고 날뛰는 이도 있었다. 언론인이, 학자가 말이다.
- 어떤 신문사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단신으로 새벽에 속보 기사를 냈다.
- 어떤 신문사는 내가 쓴 글을 고스란히 복붙해다가 기사를 쓰고서는 내 이름은 쓰지 않아 독자들의 항의를 받았다.
- 어떤 방송사는 토렌트 포트가 막혀 데이터를 받아내지 못해 기사를 못쓰고 있었다.
- 어떤 방송사는 보도를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거였다.
이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대해선 방송기자연합회 <방송기자> 지면에 정리해서 기고를 하였다.방송기자>
국가정보원에서 이 업무를 진행했던 요원은 언론사들의 뒤늦은 보도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가정보원은 이례적으로 ‘더 알려고 하지 말고 언급도 하지 마라’며 직원 일동 명의의 성명을 냈다. 어느 위키에는 내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가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거의 모든 증거를 인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변협 강의에서 이 사실을 지적했는데 방송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혀서 첫 뉴스로 나간 일도 있었다.
백도어 설치를 가능케 했던 사이버테러방지법은 무마되었지만 상위법률이던 테러방지법은 기어이 통과되었고, 과반의석을 주면 이 악법을 폐기시키겠다며 필리버스터를 했던 야당은 훗날 여당이 되고 과반을 차지했다. 2020년 12월, 테러방지법은 여전히 폐기되지 않았다.
증언
전공대로 저널리즘 분야의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일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일이라 늘 믿어왔기 때문에, 기자들의 인터뷰 부탁에는 선뜻 응하곤 했다. 수상한 데이터더러 수상하다고 이야기하는 정도는 가끔 했다. 사람이 한게 아니라 기계를 돌린게 맞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해줄 개발자조차 드물어 취재가 힘들다는 하소연을 종종 듣곤 했다. 가짜 글을 써내려가며 여론을 조작하고 누군가에게 꾸준히 상처주는 이들이 부디 합당한 처벌을 받길 바라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단지 그렇게 말을 얹기만 했던 것인데 일이 커져 눈덩이처럼 굴러간 경우도 있었다. ‘드루킹 매크로’ 사건이 그랬다. 전달받은 데이터를 보니 여러 좀비PC를 활용해 매크로를 돌린 흔적이 나왔다. 수상한 데이터인건 맞다고 이야기했다. 그 보도 직후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어느 대권주자가 잡혀 들어가고 어느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거대한 스캔들이 되고 말았다.
내부고발을 해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았다. 가장 많이 왔던 문의는 포털의 실시간검색어조작 또는 뉴스 순위 조작에 대해 목소리내는 개발자가 되어달라는 부탁이었다. 포털 첫화면이나 실시간검색어가 자기들 편에게 불리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손을 봐야겠고 내부고발자로 나서달라고 온갖 기자들과 온갖 당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이 문제에 대한 내 입장은 단호했다. ‘조작 안하려고 해도 조작 하라고 시키는 사람들이 있고’, ‘바로 그 조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그 장황한 설명을 들은 이들은 앞뒤 설명은 다 잊고서 “우리 편인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 같은 반응을 보이곤 했다.
나는 내가 증언해줄 수 있는 지점까지만 증언해주길 원했다. 누군가가 주문한 대로 연기를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유명세
신뢰나 성과를 바탕으로 한 유명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유명한 걸로 유명한 유명세는 파도 앞의 모래성과도 같아서, 언제든 쓸려나가 없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면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유명한 개발자라는 평가를 종종 받았다. 때문에 내 이름을 걸어 무언가를 해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곤 했다. 개인적인 다툼이나 송사에 지지선언을 해달라는 연락이 집요하게 오기도 했고, 스타트업 투자유치를 위해 잠깐만 이름을 올려달라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어떤 회사는 ‘유명한 개발자가 와야 다른 개발자를 데려오는게 수월하다’ 며 합류를 제안해왔었다. 그 즈음부터는 내가 제안받는 연봉이 기술적 성과나 역량이 아니라 이름값을 덤으로 얹는게 되겠구나 싶었다. 나쁜 거래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는 이름의 무게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예컨대, 저 이유로 나에게 합류를 제안하는 회사들 중 어떤 회사에게 기회를 줄 것인지 신중히 골라야만 했다. 나를 믿고 회사에 합류하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름을 얹어주는 것은 보증을 서는 것과도 같았다.
미디어스타트업
스타트업에 합류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미디어 콘텐츠를 다루는 조직에 합류하는건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돈 안되고 온갖 압력에 스트레스만 받는 일이라고 대학 학부 때부터 누누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즈음에는 외국 회사의 일도 받아다 했었고, 해외 출장도 종종 했기 때문에 이민을 가려던 계획이 더욱 구체화될 즈음이었다.
여성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유료 콘텐츠 플랫폼을 만든다는 것이 핀치 라는 서비스를 만드는 이 팀의 기치였다. 처음에는 이 목표로 구성된 팀이 아니었다. 대안매체를 만들려는 다른 중년 언론인들의 계획이 있었고, 훗날 드러났던 국정농단 관련 아이템이 한참 전이던 당시에 이미 확보되어 있었으며, 이를 포함해 각종 특종을 하나씩 터트릴 매체를 만드는 일을 도울 젊은 20대 친구들을 모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것이 이 팀의 시초였다. 돈을 가져오겠다는 유명 기자의 호언장담만 믿고서 재능있는 젊은 친구들을 소개시켜주었는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고 준비할 할 즈음, 돈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던 기자가 도망을 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유명한 사람이라고 사기를 치지는 않겠지 라고 다시금 믿었던게 또 다시 어그러진 순간이었다.
중년 어르신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본래 직장으로 돌아갔고, 젊은 친구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근처 펍에서 도망친 문제의 기자를 함께 욕하고 있는데, 재능있는 친구들을 모았다고 모은걸 보니 나 빼고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친구들이 직접 새 매체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잡지를 만드는 일은 어릴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어릴땐 소위 웹진을 만들었고 웹 방송국을 만들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더는 내가 직접 잡지를 만들지는 않지만, 그런 일을 하는 친구들을 돕는 일이라면 즐거울거라 생각했다. 나는 잠시 개발만 도와주고 투자사만 소개해주고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후 투자유치 과정에서 개발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 다음에는 남자를 끼워넣어야 한다는 이유로 여러 계약서의 의무사항에 따라 계속 함께하게 되었다.
콘텐츠 유료화에 매번 실패했던 한국의 미디어 시장에서, 여성을 타겟으로 한 버티컬 매체가 심지어 유료로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운영된다는 데 대하여 언론업계 호사가들의 관심이 정말 대단했다. “얼마나 잘 되나 두고보자”는 것이었다. 누가 만들고 있는지들 궁금해했고, 20대 여성들이 이 팀을 이끄는 것을 믿을 수 없어했다. 분명 배후에 중년 남자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대표도 편집장도 크리에이터도 일러스트레이터도 디자이너도 모두 20-30대 여성이지만 없는 사람 취급들을 했고 실질적으로는 남성인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을거라는 이야기가 업계에 나돌았다. 이 회사는 엄연히 여성들이 만들고 키운 회사이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 정말 많았다. 핀치를 만들던 20대 여성 대표와 편집장, 구성원들의 성과를 꾸준히 후려치는 시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미디어 스타트업들이 자신들의 콘텐츠나 메시지보다는 그 서비스를 만드는 ‘참신한 청년들’이 더 부각되어 곤란을 겪곤 했다. 미디어 스타트업을 언론사 취업 준비과정 중 하나로 취급하는 기성매체도 꽤나 많았다. 매체의 콘텐츠를 가리고 그 매체를 만드는 멤버들만 호명하며 매체의 격을 낮추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핀치 팀은 그런 배경에서, 핀치 서비스와 핀치의 콘텐츠가 우선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꽤 오랜 시간동안 구성원들을 일절 노출시키지 않는 전략을 취했다.
사실 이러한 전략은 제품과 함께 제품 만드는 이의 몸값도 올려 벨류에이션을 높여야하는 기존 스타트업의 성장 질서와는 맞지 않았다. 이 때문에 투자 유치에 있어 기본적으로 기회의 폭이 매우 좁았다. 수 년이 지나 하는 이야기지만, 그런 이유에서 새로운 미디어나 새로운 콘텐츠 플랫폼은 스타트업 모델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본래부터 스타트업은 돈을 빨리 벌어내지 못하면 후려쳐지기 쉬운데, 미디어 분야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안정적 수익구조를 찾을 수 있고, 그 사이에 후려쳐지면 더는 온전한 미디어가 아니게되기 때문이다.
투자 라운드
투자유치 과정에서 가장 골치아팠던 부분은 한국의 성차별 문제였다. 핀치 서비스의 타겟은 여성이었고, 핀치 서비스를 만드는 팀 구성원도 나 빼고는 모두 여성이었다. 중소기업청 ‘2016년 창업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법인 창업기업의 여성 대표 비율은 고작 12.6%이란다. 플래텀이 조사한 2016년 투자유치 스타트업 244곳 중 여성 창업기업은 6.5%인 16곳, 투자금액은 4.1%에 불과하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투자사 대표나 심사역은 거의 다 남성이었다. 투자유치를 위해 찾아간 (여성) 대표에게 단둘이 만나 술먹자고 제안한 투자사 대표도 있었고, 룸살롱에서 미팅을 하자던 투자사 대표도 있었다. 콘텐츠 시장에서의 여성 구매력을 강조하는 장표를 아무리 설명해도 “우리 마누라는 그런거 안좋아해요” 라며 손사래치던 이도 있었고, 아무리 우리 대표가 시장 성장성을 설명해도 못알아듣다가 내가 말을 얹으면 그제서야 알아듣던 이도 있었다. 대표를 남자로 바꾸면 투자해주겠다는 이들은 정말 많았고, 이들의 요구에 따라 내가 잠시 바지사장으로 이름을 걸었던 적도 있었다. 아예 경영진에 40-50대 남성을 끼워넣어야한다고 야단치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면서도, 성폭력 사건으로 기소된 어느 스타트업 대표에게는 커리어를 구제해주어야한다며 온갖 유관단체 관계자들이 발벗고 나서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건강한 투자를 구해올 수 없겠다 싶어 괴로워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집 앞 양꼬치집에서 다른 개발자들과 고량주를 왕창 먹은 뒤 일본 미디어 회사에 투자를 검토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낸 일도 있었다. 바다만 건너가도 일본 미디어 회사가 미국이나 영국의 언론사를 인수하거나 투자하는 일이 매우 흔했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니 롯폰기에서 만나자는 답장이 왔다. 부랴부랴 일본어 IR자료를 만들고 통역 도와주실 분을 수소문하여 도쿄로 날아갔다. 살다살다 내가 도쿄까지 와서 투자유치 활동을 다닐 줄이야. 하지만 협의가 무르익을 즈음 일제 강제징용 소송 판결이 터졌고, 양국 투자 교류에 제한이 걸려버렸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나 함께 도전해보았으니 할 만큼 한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감사하게도 좋은 분들도 드물게 계시어, 그분들의 도움을 여럿 받아 꽤 긴 세월동안 핀치 서비스가 운영되었다. 유료 구독 플랫폼이 안착되었고,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가 빛을 보게 되었다. 믿고 응원해주셨던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여성 구성원들더러 왜 남자와 함께 일하느냐며 공격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굳건하게 팀을 이끌던 이들을 보며 나 역시도 조직을 이끄는 방식에 대해 동료들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잠시 돕다가 나올 줄 알았던 일에 오랫동안 묶여 한탄할 때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는 이야기를 발굴해내는데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언론매체는 안정적으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스타트업은 본질적으로 ‘폭발적 성장’을 하지 않으면 성공이라 인정되지 않는다. 핀치 팀은 그 딜레마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핀치 팀에는 더 좋은 기회들이 계속 제안되었다. 팀 결성과 서비스 런칭, 멤버십의 안착, 그 이후의 긴 시간을 지나고 나서, 마침내 새로운 길을 걷기로 하였다.
핀치 서비스는 여력이 될때까지 이전 구성원들이 사비를 들여 아카이브로 보존하기로 했다. 플랫폼 서비스 사업자가 사업을 종료한다고 글과 그림까지 홀라당 날려먹는 선례가 늘 아쉬웠기 때문이다. 기존 유료 콘텐츠는 모두 무료로 공개되었다.
도쿄
스타트업에서 일할때는 거의 24시간 365일 크런치 모드였다. 연초에는 개발에 몰입하고 연말에는 투자사를 만나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투자 유치에는 댓가가 따라서 투자사의 주문을 몇가지는 약속처럼 수행해야 했다. 대규모 개편이나 신규 서비스 추가가 있을 때마다 새벽쯤 배포를 하고 테스트를 한 뒤 동이 트기 직전 비행기표를 끊어 인천공항으로 탈출하곤 했다. 주로 가까운 도쿄로 갔다. 코스는 늘 비슷했다. 도착하자마자 캐리어 던져놓고 요시노야에서 규동을 먹고, 긴자 문구점들을 한바퀴 돌고, 야마노테선을 뱅글뱅글 타거나 키치조지로 가거나 시부야를 배회하고, 마루노우치로 돌아와 회전초밥을 먹고, 저녁에 오다이바에서 맥주캔 까먹고 멍하니 야경을 보는 코스였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도피에 가까웠을 것이다. 크런치의 괴로움을 잠시 잊을 수 있었지만, 귀국하고 나면 또다시 무언가를 만들어야한다는 과제가 내 앞에 놓여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술먹고 투자요청 보냈던 사건 덕분에 그 이후에는 도쿄까지 넘어가서도 놀지도 못하고 회사 일을 해야할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이 들어 잠시 괴로웠던 시기도 있었다.
도쿄에 있던 시간만큼은 평화로웠다. 2010년대의 서울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골치아팠다. 이방인으로 있는 시간, 환대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한국의 사람들과 잠시 단절되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그 시간동안 에너지를 잠시 충전하고 돌아오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그 사이클 덕에 그나마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시간들을 견뎌내었다고 생각한다. 서울은 일터고 도쿄가 집 같았다.
마지막 도쿄 여정은 2020년 2월, 그러니까 출입국이 막히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다녀와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이럴줄 알았다면 찻잎과 식자재를 왕창 사올걸 하는 후회가 크다. 출국이 막힌 2020년에도 작년과 같은 일을 해야했다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적절한 시기에 멈춤이 결정되어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이직
핀치 팀은 2020년 7월 데이블에 인수되었고, 데이블에서는 미디어 기업을 위한 범용적인 콘텐츠 관리 시스템, SaaS CMS 개발을 맡았다. 콘텐츠 후원을 위한 결제시스템을 개발했고, Wordpress보다 더욱 고도화된 콘텐츠 편집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사업은 이후 중단되었고, 더 크게 결성되었던 팀 중 일부는 다시 다른 회사로 이직하였다)
미디어 관련 일은 더는 안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시장을 제시한 데이블과, 핀치 대표님의 설득, 그리고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 이 분야를 계속 다루기로 받아들였었다. 우리 팀의 이름은 ZET Team, 서비스 이름은 mago.works 였다. 데이블의 ZET 팀은 MVP를 빠르게 만든다거나 크런치 식으로 일을 하지 않기로 했었다. 콘텐츠 생태계를 만드는 플랫폼을 개발하는 일은 그런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늘 단호히 이야기한다. 생태계에 기여해야하는 제품을 만드는 개발자는 빠른 개발보다 좋은 개발을 고민해야하고, 개발에만 집중할게 아니라 바깥사회에도 시선과 애정을 놓치지 않는 개발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한 수많은 사건들을 겪은 결과 굳혀진 철학이다.
나로선 지난 스타트업에서 개발해오던 시스템을 글로벌 규모로 제대로 개발하는 일을 하게 된 셈이었다. 첫 회사에서 만들었던 문서 편집 플랫폼을 13년이 지나 기술 전체 리드로서 미디어 퍼블리싱 플랫폼으로 확대하여 다시 만들고 있으니 이 일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운명이구나 싶었다. 첫 회사에서는 기획자로, 두번째 회사부터 개발자로, 돌고 돌아 지금은 개발팀을 이끌고 서비스를 설계하는 역할이 되었다.
좋은 동료가 모여 좋은 일터를 만들어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좋은 동료를 절반쯤 모아낸 것 같고, 좋은 일터를 만드는건 계속 과제로 남았다. (그리고 이 꿈은 더 좋은 운과 선한 의지를 가진 이의 몫으로 남았다)
2020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광경들을 보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너무 많은 세계의 본모습을 봐버렸다. 그 덕분에 꽤나 성장을 했겠다 싶지만 꼭 이런 험악한 과정이어야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다음 10년은 그저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모아내고,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는 분명 비행기도 다시 떠다닐 것이다. 공기 깨끗하고 나쁜 말들이 없는 곳으로의 이민도 다시 노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