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이한 파티

최근 모 중앙일간지의 창립기념일 행사에 초대받았다. 청와대 수석에 국회의장에 정부 각료들, 공기업 사장들과 대기업 사장들 외교사절 등등이 모두 와있었다. 원래 언론사 생일날마다 장관들이 다 출동하나? 싶을 정도로 거의 다 왔다. 내빈이 왔다면서 이들의 이름 낭독 시간이 10여분 가량 지나갔고, 기나긴 축사가 이어졌으며, 지방선거 후보자들이 저마다 마이크를 잡고서 한마디씩 인연을 자랑했고, 이후 건배사가 세번인가 네번인가 이어졌고. 등등등… 그렇게 한시간쯤 지나서야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부페식 식사가 나왔고, 스프는 괜찮았으며, 스시코너도 있었다.

나는 그 자리가 너무 기이해서 두리번거리며 계속 관찰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업 임원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뒤섞여있었다. 앞쪽 자리에는 소위 ‘높으신 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연사 성비는 강경화 장관이 축사를 하는 바람에 그나마 한명이라도 여성이 들어갔네 싶었지만, 초대된 사람들 성비가 온통 남탕인 것은 또 아니라서 이 정도면 아주 나쁜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유심히 보았던 부분은 연령대였다. 어쨌든 내가 초대를 받았으니 내 연배쯤 되는 이들도 더 있겠지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기업 임원이라면 40대 이상일 것이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조차 20년 전 활동가가 그대로 조끼 입고 지금도 활동하는 꼴이라 머리가 희끗희끗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나와 좀 비슷해보이는 이들로는 사진기자인지 사진사인지로 보이는 젊은이 몇 명 정도였다. 그들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쩔어보이는 얼굴, 그리고 떡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양복입은 회사 간부들 사이를 휘저어다녔다. 그들 외에, 그나마 나와 연령대가 비슷해 보이는 이로는 서로 블락한 사이인 모 온라인매체 편집장 정도가 전부였다.

행사장에서 회사측이 챙기던 이들의 면면을 지켜보았다. 이름이 화면에 띄워진 연사들 다음으로 시민사회 활동가들 이름도 다 나오려나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의전’이라는게 있으니 장관이나 기업체 이사급과 시민단체 활동가를 동급으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건너편 테이블에 ‘국가보안법 악법폐지’라 쓰여진 노란 조끼를 입은 분이 보였다. 그분의 이름이나 단체명은 결코 행사에 언급되지 않았다. 케익을 자르는 자리에도 그는 초대되지 않았다. 대신 여러 국회의원들과 장관들만 연단에 올라 포즈를 취했다. 그 자리는 높으신 분들과 함께 자화자찬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기업체 간부들과 정계 인사들이 뒤섞여있었으니 이 회사가 광고협찬을 받는데에도 이 행사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시민사회진영의 목소리가 전달될 기회가 생기겠지~하고서 아쉬움을 뒤로 하는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하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식사가 오가던 와중에 ‘민족’이라는 단어가 행사장을 맴돌았다. 최근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이 회사가 숟가락 얹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민중’이라는 단어도 행사장 주변을 맴돌았다. 민중을 위한 언론이 개최한 행사의 조명이 민중을 비추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87년 민주항쟁부터 2017년 촛불시위까지 그 승리와 성과를 신문사의 성장과 함께 자축하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 활동가들도 함께 승리를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시 처음 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반복하지만, 그 행사장에서 젊은이들을 찾아보기는 정말 힘들었다. 이미 그 매체는 창간 기념 세미나를 열면서도 전년도에 같이 일했던 20대 청년 딱 한명만 불렀다. 세미나 참석자 사진을 보니 온통 할아버지들로 가득했다. 내가 초대받았던 생일잔치 자리마저도 온통 어르신들 뿐이었던지라 어쩐지 이 매체의 미래를 보는것만 같았다. 이 회사 입장에서 이런 장면을 위기의 신호로 간주하지는 않아도 된다. 나는 어느 공영방송사 강연을 가서도 느닷없이 질문을 빙자한 연설을 시작하며 ‘우리는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80대 할아버지 할머니 시청자들을 위해 계속 역할을 할 겁니다’ 라는 엉뚱한 이야기를 펼친 보도국장을 만난 일이 있다. 그가 말한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다들 혁신 안하면 망한다며 엄포를 놓긴 하지만 언론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돈 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어떤 기업이든 최소 생존은 가능하다. 돈 주는 이들에게 성의를 다하는 건 사기업이 취해야할 기본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콘텐츠를 만드는 조직, 세상을 만들고 비추는 조직, 미디어 조직, 정확히 말하면 언론사가 견지할 태도일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다. 콘텐츠를 만드는, 미디어를 굴리는 조직은 좀 더 다른 책임감을 가져야한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밥도 얻어먹었으니 입다물고 있어야 마땅하겠지만 그 자리의 기억이 너무 흥미로워 장면들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그렇게 기이한 장면은 아니고 여느 경제지 리셉션이나 대기업 리셉션과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그 신문사’의 리셉션같지 않은 어색한 공기가 느껴졌다. 노골적인 무심함마저 느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어르신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이 분명 이 사회에 유익한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을 위한 테이블’ 이 어떤 형태로든 한줄 조차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 나는 어쩐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 느껴졌다. 굳이 변명을 대신 해주자면 이 언론사만의 잘못은 아니다. 그냥 그 세대의 기본적인 세계관이 지닌 한계였을거라 생각한다. 진작에 레거시 미디어의 담론지형에서 20대는 타자화되어있다. 지면은 구색맞추기로 따로 ‘2030’같은 브랜드를 붙여 저마다 마련되어있다. 자발적으로 생겨난 20대 매체마다 어르신들이 숟가락을 얹고 빨대를 꽂으며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20대의 삶은 ‘스펙’으로 평가받고, 이들의 재능은 ‘인턴 해볼래?’ 등으로 퉁쳐진다. 마리오네트가 되는 이들에게는 사다리 흥정이 오가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가차없이 ‘싸가지없다”는 언사가 날아간다. 젊은 독자 도달율 높이기야 잘하는 청년들의 작품을 다른 인턴 알바생들을 시켜 따라만들게 하면 그만이다. 어느 밀레니얼 타겟 매체를 만드는 대표의 강연자리마다 그를 동물원 희귀동물보듯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이 가득하다. 이미 법인사업체 대표직에 있는 이에게 ‘젊은 친구 고생이 많네요 나중에 어디 취직하고싶어요?’ 같은 황당한 질문도 자주 나온다고 한다. 그런 지경이니 이들을 위한 테이블을 상상조차 하지 않은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각자 알아서 선택하면 된다. 30년 전 고객을 그대로 품고 같이 늙어가던지, 아니면 새로운 독자들을 발굴해내던지.

5년 뒤 축하 자리에는 20~30대 청년들을 위한 테이블도 마련될까? 어떤 레거시 미디어 회사가 20대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만나며 파트너쉽을 맺게 될까?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긴 할까? 하기사 5년 뒤에 나 역시도 20대 친구들과 같이 잘 일할 수 있을지 잘 모르는데 누굴 나무라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