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았나
성심병원 여성 간호사들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춤 장기자랑 행사에 동원되었던 사실이 알려지자, 아시아나항공에선 ‘여직원들을 모아 장기자랑 행사를 여는 건 우리가 원조’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다. 어디 여기뿐일까. 내가 직접 본 것만도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굴지의 정보통신 기업부터 중견 언론사에 이르기까지 신입 여직원들을 무대 위로 올려 장기자랑 행사를 해마다 열어온 곳들은 수두룩하다. 어떤 곳은 직원들을 모아다 행사를 열었고, 어떤 곳은 외부 기자까지 초대해 행사를 열었다. 업계 지인으로 만나던 이들을 무대 장기자랑에서 보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여러 팟캐스트를 거느린 모 미디어기업 임원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룸살롱에서 자주 회의를 열었다. 심지어 나도 그 장소로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사람을 처음 만나는 자리로 룸살롱을 제안하는 회사가 있다는 점에 조금은 놀랐지만, 그 초대가 ‘이런 데서 함께 놀 수 있는 이라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뜻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느 유명 미디어 스타트업은 룸살롱에서 직원 회식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전 직원이 참석하는 회식이었고, 여성 직원들에게도 소위 ‘초이스’를 시키곤 했다. 이들은 사장 개인 돈이 아니라 회사 비용으로 룸에 가곤 했는데, 그걸 투자사가 용인하는 건가 싶어 알아보니 투자사 대표와 직원들도 룸살롱을 자주 찾고 있었다.
‘여자 사장이라면 투자해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을 지난해 수도 없이 만났다. 옷이나 화장품을 파는 회사가 아닌 이상, 플랫폼 회사라면 콘텐츠 제작자들과 룸에서도 같이 놀고 싶은데 사장이 여자면 못하지 않겠느냐는 말들이 버젓이 내 주변에서 오고 갔다. 남자 동료인 내가 있었음에도 이보다 더한 말들도 정말 많이 오갔고, 그런 정서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믿어왔던 나까지도 진절머리 날 정도였다.
그 와중에 스타트업 업계의 성폭력 사건이 알려졌고, 그의 주변인들이 똘똘 뭉쳐 피해 여성을 ‘꽃뱀’으로 몰아가는 광경을 나는 그저 지켜봐야 했다. 몇몇 투자사 관계자들까지 직접 나서 입단속을 당부했다. 전도유망한 청년사업가가 꽃뱀에게 발목 잡혔다며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는 전화는 나에게도 일주일 넘게 걸려왔다. ‘한번만 자주면 투자해줄 텐데’라며 돌아다녀온 이들은 지금도 피해자의 주변을 맴돌며 방송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누가 그들을 지켜주고 있는지, 누가 그들과 함께 룸에서 노는지, 업계에는 지금도 소문이 파다하다. 그 덕분에, 피해자들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가해자들은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다.
최근 폭로가 나온 검찰 내 성추행 사건에서, 나는 장례식장에 동석하고 성추행을 목격했음에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동조자들의 존재에 주목했다. 오늘까지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고백이나 사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간 누려온 문화를 결코 되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마저 느껴진다.
이를 남자들은 ‘의리’라 부르고, 반대편에선 ‘침묵의 카르텔’이라 부른다. 그들에게 사회의 정의를 맡길 수 있을까 어쩐지 두려워졌다. 여직원 장기자랑부터 룸살롱에, 성추행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아가는 문화까지, 모두 성적 대상화를 일삼고 강간을 용인하는 ‘강간문화’의 연장선에 서 있다. 나도. 당신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던 것들 아닌가. 왜 그동안 몰랐던 것처럼 비겁하게 구는가.
한겨레 2030 잠금해제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