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수사원

‘음수사원 굴정지인’. 물을 마실 때마다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문화방송이 서울 상암동 사옥으로 이사하면서 1층 로비에다가 커다랗게 걸어놓은 한문 글귀이다. 김재철 사람으로 알려진 안광한 전 사장이 취임 일성에서 ‘음수사원’을 외쳤고, 사옥 이전과 함께 이 글귀가 방송사 로비에 내걸렸다.

문화방송의 많은 피디와 기자들은 이 글귀가 ‘돈 주는 곳의 은혜를 생각하고, 월급 주는 이를 잊지 마라’란 뜻으로 읽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재철 사장 이후 문화방송은 월급 주는 이에게 충실하지 않은 이들을 꾸준히 좌천·유배시켜왔기 때문이다. 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가 입수한 사내문서는 기자들을 4단계로 분류하며 노조원을 가리켜 ‘격리 필요’라고 기록하였고, 회사에 충성도가 높거나 순응도가 높은 이는 동그라미나 별 두 개로 분류했다. <시사매거진 2580>이나 <피디수첩> 같은 걸출한 보도 프로그램을 만들어온 이들이 샌드위치 제작 교육과정으로 보내지거나, 지방 영업직, 드라마 세트장 관리직 등으로 내보내졌다. 회사는 파업에 함께한 동기 기자들을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누구는 인천, 누구는 수원 등으로 찢어 발령내기도 했다. 그들의 빈자리는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이들로 채워졌다. 그중 어떤 이는 올해 초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고,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피켓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음수사원’의 근원인 현 사측은 이들에게만큼은 아무런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

문화방송뿐만이 아니다. <시사인>이 8월 초부터 보도한 ‘삼성 장충기 문자’ 전문에는 삼성 사장에게 언론사 핵심간부들이 열심히 로비를 벌인 정황이 드러나 있다. 모두 돈 주는 곳의 은혜를 생각하며 충성을 다한 이들의 흔적이다. 광고지원금을 8억으로 끌어올려 달라고 부탁하고는 좋은 기사로 보답하겠다고 청탁한 중앙일간지 간부의 문자는 한국 언론 생태계가 누구의 돈으로 지탱됐는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들의 삼성전자 입사를 청탁한 방송사 간부의 문자, 뒷조사 대신 해주는 통신사 간부의 문자, 사외이사 자리 하나 좀 달라고 구걸하는 한 경제지 전직 간부의 문자까지, 그간 그들이 얼마나 주거니 받거니 했으면 이런 청탁이 버젓이 오갔을지 이 문자들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자 더미에도 문화방송이 등장한다. 삼성 이인용 사장과 동기인 문화방송 ‘안 사장’이 ‘쾌히 특임’했다면서 아들 인사 배치를 확인한 ‘인사 개입’ 문자는 청년들에게 가장 민감한 취업영역까지 ‘음수사원’의 질서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가 아니면 가망 없는 ‘헬조선’이 여기서도 증명된 것이다. ‘음수사원’은 한국 사회가 함께 부패해가는 과정의 기반에 깔린 질서이다. 언론이 제 역할을 포기하고 일개 사기업으로 변해버린 과정의 중심에도 저마다의 욕망이 뒤엉킨 ‘음수사원’이 있었다. 그 바탕 위에 고위 언론인들은 민주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가 아닌 부패 권력자가 되었고, 말단 언론인들은 일개 회사원에 머무를 것을 꾸준히 종용당했다. 부패한 이들이 ‘음수사원’을 외치는 것은 카르텔의 질서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마셔온 나쁜 물과 그 근원에 충성을 다하게 된 과정을 다 함께 돌이켜 보아야 한다. 사기업이 된 곳들을 언론으로, 회사원이 된 이들을 언론인으로 돌려놓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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