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스타트업 베끼기라니
전 정권 문화체육관광부가 내가 만들던 웹서비스를 베끼겠다고 사업공고를 낸 것은 3년 전인 2014년 6월의 일이었다. 당시 내가 운영하던 서비스는 서울 홍대 일대에서 열리는 인디밴드 뮤지션들의 공연 일정을 안내하는 웹사이트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문체부가 이런 종류의 똑같은 사이트를 직접 운영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의 사업공고 문서에는 내가 만든 사이트의 주소와 캡처 화면까지 넣어 ‘참고하라’고 적혀 있었다. 심지어 내 서비스 외에도, 각종 모임이나 토크쇼 행사의 유료참가자 접수를 해주는 다른 스타트업 서비스까지 정부가 베껴서 직접 운영하겠다는 공고도 있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던 문체부 산하 기관의 관계자는 공고를 낸 직후 나를 찾아와 사이트나 데이터를 넘겨달라고 꾸준히 요구했다. 어떤 방법으로 공연 일정을 모으고 있는지, 홍대 주변 인디밴드들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하나하나 물었다. 그들은 밴드 공연 티케팅을 정부가 직접 관리해야 하고 어떤 밴드들이 활동하고 있는지 정부가 모두 파악해야 한다면서 집요하게 협조를 요구했다. 이 사업은 이후 ‘정부의 스타트업 서비스 베끼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언론에 고발되었고 결국 추진이 중단되었다.
최근 문체부 산하 한국관광공사는 자유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여행상품 티켓판매 사이트를 직접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관광공사는 수년 전부터 ‘창조관광 페스티벌’이나 ‘관광벤처 공모전’ 등을 주최하며 여행상품 티켓판매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타트업들을 도운 바 있다. 그러다 지난해 말 이들 스타트업 관계자들을 불러, 관에서 도와줄 일이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며 사업 방식이나 상품 형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얻어낸 영업 정보를 바탕으로 관광공사가 직접 유사 서비스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꾸준히 사업을 키워온 여행 스타트업들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3년 전 내가 목격했던 수법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관이 민간에서 유사 서비스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당히 베끼고 사업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심지어 3년 전 ‘스타트업 베끼기’ 시도가 좌절되었던 전례를 의식해서인지, 논란이 벌어진 이후에도 관광공사는 서비스 중단은 결코 없다면서, 스타트업과 협의해가며 사이트는 꼭 개설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되레 스타트업들에 사업 형태를 바꾸어 자신들의 티켓 사이트에 입점하라고 종용한다고 한다. 대기업만 갑질을 하는 게 아니다. 여기다 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정부가 직접 배달앱 사업에 진출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농담처럼 민간과 경쟁하는 ‘한국야식배달공사’가 설립될지도 모르겠다.
민간의 스타트업이 새 사업을 잘 꾸린다 싶으면 정부나 대기업이 세금을 투입하거나 자금력을 총동원해 동일한 서비스를 만들어 기존 사업자를 고사시키는 일이 정권이 바뀌어도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노량진 노점상들의 컵밥이 유행하자 구청에서 일제 단속을 벌이고, 대기업이 컵밥 시장에 진출하는 광경이 컵밥 외에도 여러 분야에 걸쳐 벌어지는 셈이다.
정부가 직접 자신들과 경쟁하려 하는데 이제 어떡해야 하냐며 하소연하는 여행 스타트업 분에게, 나는 “그게 한국 창업생태계의 현실”이라고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적산기업 불하도 아니고 틈만 나면 정부부터 스타트업 사업모델을 빼다 쓰겠다고 나서는데, 어느 청년들이 새 포부로 혁신적인 창업에 도전하겠나 싶다.
한겨레 2030 잠금해제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