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에게 줄을 대야 했는데
본인 소유 땅 주변에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법안을 발의한 어느 국회의원은 오늘도 버젓이 국회의사당에 출근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건설 공무원 본인이 신도시 개발 계획을 세우면서 주변 땅을 직접 사들여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도시전설이 되었다. 건설 회사를 꾸리다 국회나 시의회에 진출하는 사례도 이제는 너무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디 건설 분야만 그러겠는가. 해방 후 한국 재벌들이 새로이 부를 축적하는 데에는 내부자 거래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자산불하와 국가 주도의 구조조정은 재벌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백화점부터 통신업까지, 정권과의 유착 덕분에 성장한 서사가 없는 재벌을 찾기란 쉽지 않다. 1970년대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정권 배후 실세에게 돈을 보내어 국민연금의 손실을 감수하고서 기업 합병을 관철시킨 재벌기업이 있다. 재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창조경제의 아이콘이라던 어느 벤처회사는 대통령 측근을 임원으로 앉히고 대통령의 적극적인 홍보에 힘입어 몇백억원대 투자를 얻어냈다가 재판에 넘겨져 화제가 되었다.
새로 데뷔한 아이돌 그룹이 제대로 뜨려면 어느 피디를 찾아가야 한다는 둥 하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꾸준히 제기되긴 했다. 일종의 부패이고 척결되어야 할 문화였다. 한데 이런 부패를 척결하기는커녕 방송사 피디 대신 정권 실세가 그 역할을 대신하여 라디오 방송 선곡까지 지시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번 정권에서 아이돌 그룹이 뜨려면 정권 실세와 골프를 쳐야 했던 것이다. 사실 기업을 흥하게 하려면 정치권에 줄을 대거나 주요 인사를 임원으로 앉혀야 한다는 것은 진작부터 벤처업계나 스타트업 업종에서조차 암암리에 퍼진 불문율이었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이나 장관 자녀를 데려와 급성장한 기업은 이제 너무나도 흔하게 발견된다. 실력이 아닌 인맥과 술, 그리고 로비가 사업의 성패를 좌지우지하는 세계는 21세기에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주말마다 대통령을 규탄하는 촛불이 몇백만이 모임에도 불구하고 ‘최순실에 줄을 대야 했는데…’, ‘차은택을 내가 알았더라면…’ 하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주변에서 빈번히 발견된다. “아무개 감독이 어느 날부터 연락이 끊겼는데 알고 보니 정권 실세 아무개와 어울리며 벼락부자가 되었다더라” 같은 후문들이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퍼져나갔고, 이를 전하는 이들마다 ‘부럽다’는 반응들을 덧붙였다. 정부 사업을 넘어 민간 영역까지 망라하는 정권 주도의 부패 시스템이 사회 전 분야를 차지해버렸다는 사실이 이번 박근혜 게이트를 통해 밝혀졌다.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주변을 처단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패 시스템을 누리는 이들의 얼굴만 바뀌어왔을 뿐, 시스템은 오래전부터 내려왔다. 골프 약속이나 술 영업이 아닌 온전한 실력으로 경쟁하는 시장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 ‘나에게 잘 보여야 앞으로 삶이 순탄해질 것’이라 으름장 놓는 이들의 시대도 이제는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걔는 정권에 찍혔어” 같은 극언을 우리는 또다시 마주해야 할 것이다. ‘정경유착 근절’이라는 구호는 김영삼 때부터 꾸준히 들어왔던 이야기이건만, 명왕성으로 탐사선을 쏘아 올리는 2016년에도 이 구호를 꺼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겨레 2030 잠금해제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