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려 들더니

지난 7월, ‘왕자는 필요 없다’는 문구가 적힌 페미니즘 캠페인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한 성우에게 거세게 항의를 하던 무리들이 있었다. 그 성우를 응원하던 웹툰 작가들까지 이들로부터 ‘왜 편을 드냐’며 거센 항의를 받았다. 그들이 작가들에게 외쳤던 구호는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였다. 이 성우에 연대를 표명했다가 자중지란을 겪은 정의당 당원게시판에서 터져 나왔던 구호 역시 ‘당원들을 가르치려 드는 엘리트주의는 개나 줘라’였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분석 기사를 내놓았던 시사주간지 <시사인>을 거세게 비난하는 무리들이 외친 구호 역시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였다. 이 남성 무리들은 연대 표명부터 분석 보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모든 행위에 대해 ‘주제에 맞지 않게 상대를 가르치려 들었다’고 역정을 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을 함부로 가르치려 들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시사인> 불매운동을 벌이고 작가 퇴출운동을 벌이며 자신들의 세를 과시한다.

작년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급부상에 함께했던 여러 인문학 책들 중 ‘맨스플레인’ 개념을 소개했던 책의 제목 또한 공교롭게도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였다. 허세 넘치는 남성들의 일상적인 ‘맨스플레인’은 여성의 주체성과 사유를 관계 속에서 꾸준히 지워가는 실천이다. 이 책은 이러한 ‘맨스플레인’과 같은 일상 언어에서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미소지니(여성혐오)와 성차별에 대해 다룬 책이었다. 일상적인 여성혐오는 일상적인 대화 태도에서부터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번역 제목인 ‘가르치려 든다’라는 표현은 사유와 성찰의 통제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둘러싼 힘의 대결구도를 담은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가르치려 든다’고 이야기할 때엔 이 표현을 누가 발화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180도 달라진다. 가르치려 드는 권력을 지니고 있던 몇 남성들이 정작 상대가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자 격렬히 거부하며 ‘가르치려 들지 마라’고 외치는 이 모습에서 그들이 ‘가르치려 드는’ 지위를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 함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이들의 우격다짐은 대화 상대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라 하더라도 ‘교수님이 잘 모르나 본데’라며 위키 문서 링크를 출처로 가져와 역으로 가르치려 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함께 세를 과시하는 비슷한 무리들에게 자신의 지성을 통째로 맡기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 모든 과정이 일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우리는 이런 비슷한 무리들을 과거에도 종종 목격해왔다. 17년 전 문화방송 주조정실을 점거하며 <피디(PD)수첩> 방송을 막았던 한 교회 신도들이 있었다. 황우석 배아 복제 조작은 사실이 아니라며 우겨왔던 이들이 있었다. 타블로의 졸업장이 가짜라고 우겨왔던 이들이 있었다. 세월호 단식농성장 앞에서 피자를 먹으며 이른바 ‘폭식투쟁’을 했던 무리들도 있었다.

지성을 부정하는 광기는 우리 곁에 늘 있어왔고, 지금은 그것이 페미니즘이라는 전장에 떠다니는 것이며, 앞으로도 여러 사회 쟁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이들에 우리는 잠시 경악했을지언정 결코 위축되지는 않았다. 이번 달에도 한 온라인 서점의 사회과학 베스트셀러 순위 10위 안에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이 절반을 차지했다. 공부는 더더욱 셀프가 맞다. 게다가 앞으로도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고 싶은 이들이라면 더욱 사유와 성찰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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