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코끼리탈에게
분홍코끼리탈을 뒤집어쓰고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추모객들을 조롱하다 군중들의 거센 항의에 떠밀려 도망친 날 밤, 당신은 그간의 삶에서 처음으로 분함을 느꼈을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떻게 복수할지 내내 궁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베’에 당신의 사연이 요란하게 올라와 많은 남자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았으니 당신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이 늘 겪어왔던 외로운 밤을 당신은 영원히 겪지 않아도 된다. 성범죄 피해 직후 부모님에게 토로했건만, 신고나 위로는커녕 왜 여자가 밤늦게 다녀서 그런 일을 당했냐며 도리어 야단치는 부모님 성화에, 가족으로부터도 외로워지는 그런 밤을 당신은 영원히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축하한다, 분홍코끼리탈. 앞으로도 당신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아들만 찾는 반도 땅에서 여아낙태가 횡행하던 와중에 아들임이 확인된 덕분에 무사히 태어났다. 여자라는 이유로 부모 몰래 조부모 손에 이끌려 해외로 입양되는 위험도 무탈하게 넘겼다. 축하한다, 분홍코끼리탈. 당신은 여성이 아니었기에 학교 근처 바바리맨의 성희롱 위협에서도 안전하게 자라왔다. 여성이 아니었기에 등굣길 봉고차 납치의 위험도 당신을 무사히 비켜갔다. 여성이 아니었기에 늦은 밤 난데없이 낯선 길로 접어드는 공포스러운 택시 탑승 경험도 당신은 겪지 않았다. 여성이 아니었기에 귀갓길 뒤를 쫓아오는 남성과 마주칠 일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에 손목을 잡아끄는 남성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늦은 밤 귀갓길도 홀로 거닐 수 있었고, 사귀는 이에게 이별을 통보한다고 폭행당할 일도 없었다. 위아래를 훑어보는 남자의 불쾌한 시선도, 혼잡한 지하철에서 몸을 더듬는 남자의 손길도, 자취방 문을 열고 난입하려는 낯선 이의 그림자도 당신은 접할 일이 없었다. 당신은 학창시절 친구들과 주먹다짐하던 경험을 되살려 혹여나 누군가 당신을 위협한다면 곧바로 넘어뜨리거나 반격할 수 있는 준비도 갖추었다. 앞으로도 당신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로부터 생명이나 존엄의 위협을 받을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남녀공학에서 늘 성적 순위에 여학생들에게 밀려 느꼈을 억울함조차도, 성인이 된 뒤 유리천장의 혜택 속에 승진 기회로 손쉽게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분홍코끼리탈, 당신의 남은 시간들마저도 축하한다.
지나가는 여성의 몸매를 훑으며 점수를 매겨왔던 남성들, 운전이 미숙한 이를 가리켜 ‘김여사네!’라고 외쳐온 남성들, 이들을 제지하지 않고 침묵해왔던 한국 남성들 모두가 분홍코끼리탈들이다. ‘겨우 살아남았다’는 비통한 외침을 뒤로하고, 분홍코끼리탈 당신은 그런 공포를 남의 일로 여기며 앞으로도 무탈하게 살아갈 것이다. 분홍코끼리탈 당신이 그간 살아오면서 누려온 안전은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겐 여성이라는 이유로 빼앗겨왔던 것들이다. 당신이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이 모든 일들을 대한민국의 수많은 여성들은 늘 경험해왔다. 분홍코끼리탈 당신이 누려온 안전은 실은 특권이었던 것이다. 분홍코끼리탈 당신은 여성을 향한 폭력의 조력자, 동조자였으며 방조자였다. 여성이 아니었던 덕분에 얻은 불평등의 특권을 자각하지 않고, 이를 몰랐음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분홍코끼리탈 속에 숨어 시민들의 슬픔을 조롱하기나 하는데, 그게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면 무엇이 가해자이겠는가?
한겨레 2030 잠금해제 칼럼